비류 온조, 심리적 안전감의 시선으로 본 백제 건국
비류는 온조보다 먼저 태어난 형이자, 명분상으로는 백제의 초대 왕이 되었어야 할 인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백제의 역사는 ‘온조왕’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1. 비류와 온조, 백제의 두 지도자
겉으로 보기엔 당연히 장자인 비류가 주도권을 쥘 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형으로서의 정통성과 권위를 바탕으로 초기 무리를 이끌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어요. 실제로 비류가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남하해 직접 미추홀에 도읍을 정하고 ‘비류국’을 세웠다는 기록도 있다고 합니다.
정통성과 명분이라는 측면에서 비류는 확실히 앞서 있었고, 초기에는 그를 따르는 무리도 꽤 많았겠죠. 하지만 역사는 조용히 다른 길을 택합니다.
백제를 세운 인물로 널리 알려진 온조는 비류와 달리 한강 남쪽의 평야 지대를 선택하면서 도읍지를 정했고, 주변의 지세와 백성의 생활 기반을 냉정히 판단했습니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그는 위례성에 도읍을 세우기 전에 지형을 살핀 뒤 신중하게 선택했다는 점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초기 입지 조건만 본다면 비류가 선택한 미추홀(지금의 인천)이 무역이나 외부 소통에는 유리할 수 있었지만 이제 막 자리 잡는 나라 백성들이 농사를 짓고 실제 생활 기반을 다지기엔 어려운 면이 있었습니다. 온조는 한강 남쪽의 지형과 수원, 기후까지 고려해 도읍을 정했고 이건 단순한 땅의 문제가 아니라 리더로서 백성들의 생존과 안정을 현실적으로 고려하여 ‘사람들이 살기에 어떤 환경이 좋은가’를 신중하게 고민한 후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백성들이 더 살기 좋은 곳은 온조가 고른 곳이었죠. 백성들은 결국 온조를 따르고, 온조는 그것을 무겁게 책임지며 나라의 초석을 다져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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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제의 뿌리를 만든 힘, 온조왕 리더십과 심리적 안전감
백제 온조왕은 크고 강한 목소리로 자신의 권력을 주장하거나 형 비류를 몰아낸 인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매우 조용하고 침착하게, 다툼 없이 스스로 길을 선택하고 결과로 증명한 리더입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온조는 백성들과 신하들의 신망을 얻어 자연스럽게 왕으로 추대됩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처한 어려움을 솔직히 털어놓았을 것이고 실패나 실수를 해도 벌을 두려워하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을 것입니다. 온조는 묵묵히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을 택했고, 백성들에게 안정된 삶의 터전을 제공하면서 신뢰를 쌓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온조는 명확한 비전을 소리치지 않았지만, 실질적인 안정과 생존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사람들은 스스로 그를 선택했습니다. 온조는 무언의 신뢰를 쌓으며 자신이 통제하려 하기보다, 백성들에게 선택받는 리더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안전감 기반 리더십의 핵심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구성원들이 자유롭게 회의에서 의견을 말하고 실험적인 시도도 해볼 수 있는 ‘심리적 안전감’이 생긴 셈입니다.
현대 조직에서도 온조형 리더는 점점 주목받고 있습니다. 조용한 리더라고 해서 존재감이 없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실수해도 괜찮다고 느끼게 만드는 분위기, 즉 심리적 안전감을 조성할 수 있는 리더는 팀의 성과와 창의성을 끌어올릴 수 있지요.
심리적 안전감 (Psychological Safety)이라는 개념은 하버드 경영대학원 에이미 에드먼슨 (Amy Edmondson) 교수가 1999년에 진행한 연구에서 처음 제안된 것입니다. 에드먼슨 교수는 미국의 대형 병원 내 51개 의료 팀을 대상으로 실수를 인정하거나 질문을 던지고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행동이 어떻게 팀의 학습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조사했어요.
설문과 관찰을 통해 팀 분위기를 분석한 결과, 심리적 안전감이 높은 팀일수록 실수를 숨기지 않고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며 서로에게서 배우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고, 그 덕분에 실제 업무에서도 더 나은 성과를 냈습니다.
흥미로운 건, 심리적 안전감이 높은 팀이 실수를 ‘더 많이’ 했기 때문이 아니라, 실수를 ‘숨기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낮은 안전감 팀은 실수를 숨기고 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즉, 심리적안전감이란 팀 구성원들이 대인관계에서 리스크를 감수해도 괜찮다고 믿는 공유된 신념 (A shared belief held by members of a team that the team is safe for interpersonal risk-taking)을 말합니다.
이 연구는 단순히 "사람들이 잘 지내는 팀이 좋은 팀이다"가 아니라 심리적 안전감이라는 집단적 신념이 조의 학습과 성과에 결정적 영향을 준다는 걸 실질적으로 증명한 결정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온조의 리더십은 강한 카리스마나 통솔력보다는 ‘심리적 안전감’을 통해 형성된 집단적 신뢰에서 출발합니다. 오늘날 조직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그가 이끌었던 분위기는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따르고 헌신할 수 있는 심리적 기반이 매우 단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대의 구글이나 픽사처럼 심리적 안전감이 높은 조직은 구성원들이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내고, 서로 협력하면서 탁월한 성과를 냅니다. 자율성을 보장하는 스타트업 대표들이나 심리적으로 안정된 교실을 만들어 학생들의 수업참여를 이끌어내는 선생님들도 이에 해당하겠지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말 잘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가 아닌, 묵묵히 팀원을 살피고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리더, 바로 온조형 리더가 오늘날에도 꼭 필요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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