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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n 한국사/백제

소서노 백제 건국의 설계자, 고구려를 세운 여인이 택한 또 다른 시작

by 레미 언니 2025.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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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서노, 두 번째 나라를 세우다

 

고구려가 건국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소서노는 주몽 곁을 떠나 두 아들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왕비로서 고구려의 시작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던 그녀가 왜 고구려를 떠날 수밖에 없었을까요?

1. 고구려를 세운 여인, 왜 떠나야 했을까

그 배경에는 주몽의 아들 유리의 귀환이라는 사건이 있습니다.

 

주몽은 부여에 머물던 시절 이미 부인 예씨와 아들 유리를 둔 상태였고, 훗날 유리가 고구려로 돌아오자 주몽은 그를 태자로 삼고 후계자로 임명합니다.

 

이는 고구려 왕실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한 결정이었지만, 소서노와 그녀의 아들들에게는 매우 큰 변화이자 위기의 시작이었습니다.

 

소서노의 아들 비류와 온조는 고구려 건국 과정에서 누구보다 앞장섰던 인물들이었고, 그 중심엔 늘 소서노의 정치력과 재정적 지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왕위 계승 구도 속에서 소외되자, 소서노는 조용히 고구려를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이는 후퇴가 아닌, 스스로 새로운 역사를 쓰기 위한 결단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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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강을 품은 여왕, 소서노의 두 번째 도전

소서노는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한반도 남부로 향합니다.

 

그들이 정착한 곳은 바로 한강 유역의 위례성이었습니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데다 물도 풍부해 방어에 유리하고, 농경과 교통에도 적합한 최적의 장소였지요.

 

정착 후, 두 아들은 각기 다른 곳에 도시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소서노는 단지 ‘어머니’의 역할을 넘어선 존재라고 보여집니다. 그녀는 두 아들의 갈등을 조율하고 세력이 안정되도록 세심하게 배려했습니다.

 

한강을 품은 여왕, 소서노의 두 번째 도전
고구려를 세운 여인 두번째 나라를 세우다

 

비류는 바닷가 근처 미추홀, 지금의 인천 일대를 택했습니다. 평야가 넓고 바다와 가까워 상업적으로 유리하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온조는 위례성을 고수했습니다. 내륙에 있어 안정적인 방어가 가능하고, 농업에도 유리했으며 북방 세력과 적절한 거리를 둘 수 있다는 점에서 유리했지요.

 

하지만 결과는 달랐습니다.

 

미추홀은 지형이 습하고 물이 짜서 마시기 어려웠으며, 병이 돌면서 정착이 어려워졌습니다. 낙심한 비류는 세상을 떠나고, 그의 무리도 모두 온조에게 귀속됩니다. 이렇게 백성의 힘이 집중되며 온조의 권력은 더욱 안정되었고, 위례성이 백제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고구려 시절부터 함께해 온 인재들도 자연스럽게 온조 곁으로 모였고, 그녀는 그들을 체계적으로 배치하며 국정 운영의 틀을 잡아갔습니다.

 

특히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정착지는 남쪽 마한 세력과의 연결은 물론, 고구려와도 적절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기에 새로운 국가를 세우기에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이는 소서노의 탁월한 안목이 있었기에 가능한 선택이었습니다.


두 왕국의 건국을 이끈 여인

3. 나라이름이 된 ‘백제’, 그 안에 담긴 뜻

온조는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며 처음에는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했습니다.

 

여기서 ‘제(濟)’는 강을 건너온 사람들, 혹은 물길을 건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고, ‘십’은 다양한 부족이나 이주민 집단이 함께 모였다는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십제’는 ‘백제(百濟)’로 이름이 바뀝니다. 『삼국사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온조가 나라를 세우고 ‘십제’라 하였는데, 후에 비류의 무리를 합치면서 ‘백제’로 고쳤다

 

 

이 변화는 단지 숫자만의 차이가 아닙니다.

 

이는 국가의 확장과 통합, 그리고 다양한 세력의 융합을 상징하는 상징적 조정이었습니다.

 

비류의 백성이 온조에게 합류하면서 인구도 늘고 국가 기반도 단단해졌기 때문에, ‘십’보다 더 크고 상징적인 ‘백(百)’이라는 이름으로 바꾼 것이지요.

 

이 시기 소서노는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다양한 부족이 안정적으로 융합될 수 있도록 조율했고, 새로운 행정 조직과 권력 구조를 설계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백제가 고구려의 제도를 일부 계승했다는 점도 눈에 띄는데요, 이는 소서노가 고구려에서 쌓은 통치 경험을 백제에 적극 반영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단순히 왕을 보좌하는 조력자가 아니라, 실질적인 창업 군주이자 전략가였습니다.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의 뿌리에는 언제나 그녀의 결단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녀의 리더십은 국가의 방향을 결정짓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고구려 백제의 설계자 소서노
고구려 백제의 설계자 소서노


4. 두 왕국의 설계자, 소서노

소서노는 한 시대를 열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고구려에서 주몽과 함께 나라를 세운 것도, 백제에서 온조를 도와 또 다른 나라를 일군 것도 모두 그녀의 선택과 결단에서 비롯된 일이었습니다.

 

정치력, 외교력, 판단력, 경제력 그녀는 이 모든 역량을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여성의 리더십이 드물던 고대 사회에서, 소서노는 단순히 왕의 부인이자 어머니 역할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국가를 설계하고 움직이며, 역사 속에서 살아 있는 존재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소서노를 고구려와 백제 모두의 건국에 참여한 유일한 인물로 기억합니다.

 

그녀의 이름은 단지 전설 속 한 줄이 아니라, 우리 역사 속 깊숙이 새겨진 진짜 이야기입니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두 나라의 찬란한 시작에는, 바로 소서노라는 여성의 힘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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