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천랑, 선덕여왕 시대 끝까지 신뢰받은 화랑
신라의 왕이 아니었지만, 왕에 가까운 신임을 받고 긴 세월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 바로 알천(閼川)입니다.
드라마 <선덕여왕>을 통해 대중에게 충성스러운 무장의 이미지로 알려진 그는, 실제 역사에서도 신라 정치의 중추를 지키며 굳건한 영향력을 발휘한 진골 귀족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사료를 바탕으로 알천의 실체를 들여다보고, 그가 어떻게 선덕여왕을 비롯한 여러 왕들의 신뢰를 얻었는지,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주목할 만한 그의 정치적 처신과 덕망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드라마 속 알천 vs. 역사 속 알천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알천이 철저히 충성스럽고 유쾌한 이미지의 무장으로 그려집니다. 여왕과 동고동락하며 목숨을 걸고 그녀를 지키는 모습은 많은 시청자에게 인상 깊게 남았죠.
그러나 역사 속 알천은 군사 지도자이면서 정치 중재자, 왕권의 균형추 역할을 했던 조정자였습니다.
그가 여왕에게 충성을 다한 것은 사실이지만, 단순히 감정적 충성만으로 그렇게 오랫동안 정권 중심에 남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의 충성은 ‘국가와 질서’에 대한 충성이었고, 그것이 곧 왕실에 대한 신뢰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화랑에서 상대등까지… 권력의 중심을 지킨 사나이
알천은 신라 진골 귀족으로, 화랑 출신이자 군사·정치 양면에서 탁월한 경력을 쌓은 인물입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그의 출생이나 집안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많지 않지만 그가 화랑으로 시작하여 대장군, 상대등 등 핵심 요직을 역임하며 국가의 실권자 중 한 명으로 자리 잡았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시대는 신라의 정치적 위기가 반복되던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에 알천은 군사적 지도자이자 정치적 안정의 조정자로서 큰 역할을 했습니다.
비담의 난을 막은 또 하나의 영웅
알천이 역사적 주인공으로 본격 등장하는 사건은 비담과 염종의 난(647년)입니다.
이 반란은 선덕여왕의 말년, 신라의 왕위 계승에 혼란을 불러일으킨 큰 정치적 사건이었으며, 왕권을 위협하는 중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이때 알천은 대장군으로서 김유신과 함께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신라 사회는 여왕에 대한 의심과 혼란이 컸고, 내부 권력 다툼도 심각했는데, 알천은 끝까지 왕실 편에 서서 질서를 회복하고 국정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반란 진압 이후, 그는 신라 최고위 귀족 관직인 상대등에 올랐습니다.
이 상대등은 귀족회의(화백회의)의 의장을 맡으며 왕권과 귀족의 균형을 조율하는 실질적인 권력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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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에 가장 가까운 사내, 그러나 권력을 사양한 신라의 그림자 왕
알천의 정치적 위상은 진덕여왕 사후 더욱 극적으로 드러납니다.
『삼국사기』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후대 전승과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등에 따르면 진덕여왕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화백회의에서는 알천을 섭정 왕(代王)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사양하고, “차세대 지도자는 김춘추가 되어야 한다”며 권좌를 양보합니다.
정치적 욕심보다 나라의 안정을 우선시한 이 판단은, 알천이 단순한 야심가가 아닌 고도의 정치 감각과 도덕적 리더십을 지닌 인물임을 보여줍니다.
“진덕여왕 사후 귀족들은 알천공을 대왕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그는 춘추공이 백성들의 뜻에 부합한다고 하며 스스로 사양하였다.”
<후대 전승에 기반한 기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알천이 단순히 권력을 유지한 인물이 아니라, 권력의 흐름을 이해하고 자신이 물러날 타이밍조차 꿰뚫는 정치적 통찰력을 가졌다는 점입니다.
알천이 오랫동안 신임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
1. 실무 능력과 정치 감각
알천은 전장에서의 경험뿐만 아니라, 정국을 읽는 능력에서 뛰어났습니다.
그는 자신이 전면에 나설 타이밍과 물러설 타이밍을 정확히 판단했고, 이런 점이 왕들과 귀족들 모두에게 깊은 신뢰를 주었습니다.
2. 자기 절제와 비욕심
비담의 난 이후 그는 실권을 장악할 수 있었음에도 끝내 왕위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김춘추에게 정권을 넘긴 결정은 결과적으로 삼국통일의 길을 여는 정치적 포석이 되었고, 이는 후대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입니다.
3. 제도 내에서의 합법성 유지
그는 화백회의라는 제도적 틀 안에서 움직였고, 권력을 전횡하기보다 절차와 합의를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는 그가 귀족 사회 내에서 오래도록 신망을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왕이 되지 않아 더 위대한 신라의 남자, 알천
알천은 단 한 번도 왕좌에 앉지 않았지만, 그 누구보다 왕권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고, 신라의 정치 기반을 탄탄히 다지는 데 핵심 역할을 한 인물이었습니다.
화랑으로 시작해 대장군, 상대등, 그리고 섭정왕 후보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은 “권력을 가지되 탐하지 않은” 이상적인 정치가의 전형이었습니다.
그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분명합니다. 진정한 리더십은 권력을 쥐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권력을 쓸 줄 아는 지혜와 내려놓을 줄 아는 품격에서 온다는 사실입니다.
알천은 그런 의미에서, 신라 역사 속에서 가장 품격 있는 정치인이자, 조용히 나라를 지킨 신라의 거목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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