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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n 한국사/신라시대

김유신과 선덕여왕, 국난을 극복한 진정한 파트너십

by 레미 언니 2025.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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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과 선덕여왕, 진정한 파트너십의 역사

신라의 역사에서 김유신은 단지 전쟁을 잘한 장군이 아닌, 삼국 통일의 길을 연 국가 전략가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그는 백제와의 전투에서 수많은 승리를 이끌었고, 통일 신라의 초석을 다졌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공적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단단한 신뢰와 협력의 관계, 곧 선덕여왕과의 정치적 파트너십이 존재합니다.

 

오늘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확실한 사료를 중심으로, 김유신과 선덕여왕이 어떻게 위기의 시기에 손을 맞잡고 신라를 지켜냈는지, 그리고 우리가 그들의 협력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김유신, 무장 그 이상의 인물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은 그의 인물됨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유신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무예에 능하였으며, 말 타기와 활쏘기를 익혀 장차 장수로 성장할 기질을 보였다.”
—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그의 이름은 곧 백제와의 전쟁 승리, 황산벌 전투, 삼국 통일이라는 신라 후반기의 역동적 서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는 660년 백제 정벌을 성공시켜 신라의 대외 위상을 끌어올렸고, 나아가 668년 고구려 멸망에도 간접적으로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김유신이 단순한 군사 지도자를 넘어선 이유는, 국가의 정치적 위기에서 중심을 지킨 전략가이자 충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모든 공적은 왕실과의 견고한 신뢰 관계 위에서 쌓아 올려진 것입니다.

 

[역사이야기] - 신라의 불세출 영웅, 김유신 : 무장이자 정치가, 그리고 화랑

 

신라의 불세출 영웅, 김유신 : 무장이자 정치가, 그리고 화랑

신라의 불세출의 영웅, 김유신: 무장이자 정치가, 그리고 화랑“충(忠)과 효(孝), 그리고 통일의 칼을 쥔 사나이.”이 한 문장은 신라의 명장 **김유신(金庾信, 595~673)**을 가장 잘 설명해줍니다.

doremisis.tistory.com

신라 김유신, 무장 그 이상의 인물
신라 김유신, 무장 그 이상의 인물


선덕여왕, 여성 통치자의 위기와 결단

선덕여왕은 신라 최초의 여성 군주이자 삼국 전체를 통틀어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632년에 즉위하였으나, 여성 군주에 대한 귀족 세력의 반발과 외세의 침략, 연이은 가뭄과 흉년 등으로 정치적 기반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그럼에도 선덕여왕은 불교 진흥과 과학 기술(첨성대 건립 등)을 통해 민심을 수습하고, 신라의 정체성과 결속을 강화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국정 운영의 중심에, 여왕을 군사적으로 보필하고 정치적 안정을 함께 고민한 인물이 바로 김유신이었습니다.

 


김유신과 선덕여왕 파트너십의 진면목

김유신과 선덕여왕의 관계는 단지 ‘충신과 군주’의 관계를 넘어선, 위기의 국가를 함께 지탱한 실질적인 정치적 동반자 관계였습니다.

 

『삼국사기』 선덕왕 본기에는 이들의 협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647년에 발생한 비담과 염종의 반란입니다.

 

 

“비담과 염종이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 왕은 김유신에게 명하여 이를 토벌하게 하였다. 유신은 사흘 만에 이를 평정하였다.”
— 『삼국사기』 선덕왕 본기

 

당시 비담은 ‘여자가 나라를 다스리면 나라가 망한다’는 구호를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는 선덕여왕의 통치 자체를 부정하려는 정치적 공격이었고, 신라의 존립을 위협하는 중대한 사태였습니다.

 

여왕은 이 중요한 순간에 김유신에게 토벌을 전적으로 맡겼고, 김유신은 사흘 만에 반란을 진압하며 왕권의 정통성과 안정을 끝까지 지켜냈습니다.

 

이 반란이 여왕의 말년, 그리고 후계자인 진덕여왕에게 정권을 이양하는 시기에 일어났다는 점에서, 김유신의 역할은 단순한 군사 진압을 넘어 정권 이양의 안정적 통로 역할까지 수행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충성과 지혜로 세운 정치적 신뢰

김유신은 단순히 전투를 잘한 장수가 아니라, 여왕의 국정 운영 전반을 지탱한 실질적인 조력자였습니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은 이를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유신은 나라를 위해 군사를 일으켜 여러 차례 공을 세우고, 충성과 지혜로써 임금을 도왔다.”
—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이처럼 사료는 군사적 공적보다 먼저 ‘충성과 지혜’를 강조합니다. 이는 그가 국가 전체의 전략을 이해하고, 여왕의 정책을 실행해 낸 정치 파트너로서 기능했음을 보여줍니다.

 

김유신과 선덕여왕, 국난을 극복한 진정한 파트너십
김유신과 선덕여왕, 국난을 극복한 진정한 파트너십

 


우리가 오늘날 배울 수 있는 역사적 교훈

선덕여왕과 김유신의 관계는 단순한 상하 위계의 명령 체계가 아니라, 공통의 비전과 상호 신뢰를 기반으로 한 정치적 파트너십이었습니다.

 

선덕여왕은 국난의 시기에 즉위한 지도자였지만, 스스로를 중심에 세우기보다 유능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기용함으로써 왕권을 안정시켰습니다.

 

김유신은 그러한 지도자의 뜻을 헤아리고 충성뿐 아니라 상황 판단력, 정치적 결단력을 발휘해 그 비전을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권력자는 자신의 부족함을 채울 조력자를 신뢰하고, 조력자는 그 신뢰에 정치적 책임으로 보답할 때, 공동체는 위기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조직이나 국가의 리더십은 어느 한 사람의 능력만으로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변화가 빠르고 위기가 상시화된 오늘날일수록, 통찰력 있는 지도자와 실행력 있는 조력자의 유기적인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선덕여왕과 김유신은 이를 7세기 신라라는 환경 속에서도 실현해 냈고, 그것은 신라를 멸망 위기에서 구하고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사례는 지금 우리의 조직과 사회가 갖춰야 할 리더십의 조건, 즉 ‘비전을 공유하며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는 협력’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덕여왕과 김유신의 관계는 단순한 명령과 복종의 관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서로를 인정하고, 공동의 위기를 함께 해결해 나간 실질적 동반자 관계였습니다. 사료가 전해주는 짧고도 분명한 기록만으로도, 두 사람 사이의 신뢰와 협력의 깊이를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신라의 삼국 통일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처럼 국난의 시기를 함께 견디며 쌓아온 파트너십 위에서 비로소 가능했던 역사적 성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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