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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업적으로 본 신라 여왕의 리더십과 지혜

by 레미 언니 2025.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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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업적으로 본 신라 여왕의 리더십과 지혜

신라 제27대 왕이자 삼국시대 첫 번째 여왕인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년)은 단순한 상징적 존재를 넘어, 혼란기 속에서 신라를 안정시키고 문화와 국가 체제를 정비한 실력 있는 정치가였습니다.


그녀가 다스리던 시기는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 위협이 가중되던 불안한 국면이었지만, 선덕여왕은 외세에 휘둘리지 않고 내정을 다지고 미래를 준비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특히 그녀의 업적 중 천문학, 건축, 불교, 외교와 관련된 실천은 지금까지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선덕여왕 업적으로 본 신라 여왕의 리더십과 지혜
선덕여왕 업적으로 본 신라 여왕의 리더십과 지혜

 

오늘은 선덕여왕의 대표적인 업적들을 중심으로, 그녀의 뛰어난 통치력과 그 이면의 철학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선덕여왕 업적>

1. 첨성대 건립  하늘의 질서를 읽고 정치를 펼친 선덕여왕의 천문 정책
2. 황룡사 9층 목탑  삼국을 품고자 한 상징적 불탑 건립, 자장과의 협력
3. 분황사와 약사불  백성의 안녕을 위한 치유의 사찰, 불교를 통한 복지
4. 자장법사와 국사 체계  불교를 국정 운영에 통합한 여왕의 리더십 핵심
결론  통일 전야의 혼란 속에서도 미래를 설계한 준비의 정치

 


1.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 ‘첨성대’ 건립

선덕여왕이 남긴 가장 상징적인 업적 중 하나는 바로 첨성대(瞻星臺)의 건립입니다. 지금의 경주에 위치한 이 구조물은 단순한 문화재를 넘어 과학과 정치, 천문과 신앙이 교차하는 국정 운영의 핵심 수단이었습니다.

 

당시 삼국은 천재지변과 외세의 침략으로 불안한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하늘의 움직임은 자연의 이치이자, 신의 뜻으로 여겨졌던 만큼 천문 관측은 곧 왕의 덕과 권위를 보여주는 수단이었습니다.

 

《삼국유사》 ‘기이 편’ 선덕왕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왕이 별을 보고 세운 것이 첨성대이다.”

 

첨성대는 약 27층의 돌로 쌓아 올린 정방형 구조로, 정교한 곡선이 특징이며 정남향으로 세워졌습니다. 내부에는 천문 관측을 위한 사다리와 공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건축물은 과학기술력의 상징일 뿐 아니라, 백성들에게 하늘의 질서를 읽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왕의 신뢰 행위였습니다.

 


2. 황룡사 9층 목탑 건립 지시 – 삼국 통합 염원 담긴 불탑

선덕여왕은 불교를 통해 백성을 안정시키고, 삼국의 균형을 맞추고자 하는 종교 정치적 접근을 시도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황룡사 9층 목탑 건립 지시입니다.

 

황룡사는 신라 왕실이 중심이 되어 건립한 대형 사찰로, 선덕여왕은 이 사찰의 중심에 9층의 거대한 목탑을 세울 것을 명했습니다.

 

이때 고승 자장법사의 조언을 따라 세 나라(고구려·백제·왜)를 상징하는 3층을 더해 9층으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삼국유사》 ‘탑상편’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장이 말하기를, ‘구층탑을 세우면 삼국이 복종하리이다.’ 하니 왕이 이를 따랐다.”

 

이 목탑은 단순한 종교 시설이 아닌, 삼국 통일을 향한 정치적 의지의 상징이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이 끊이지 않았던 상황에서, 이 9층탑은 신라가 중심이 되어 삼국을 하나로 통합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상징 건축물이었고, 신라 국민들에게도 큰 심리적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3. 분황사 건립과 약사여래신앙의 확대

분황사는 선덕여왕이 창건한 또 하나의 대표적인 사찰입니다.

 

이곳은 단순한 왕실 불사(佛寺) 차원을 넘어, 국가적 치유와 복을 비는 신앙 중심지였습니다. 특히 약사불(藥師佛, 질병을 고치고 중생을 구하는 부처)을 봉안해 백성들의 건강과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는 장소로 기능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여왕이 분황사를 세우고, 약사불을 봉안하였다.”

 

분황사에 있는 석탑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으며, 한국 최초의 석조 전탑이라는 점에서 예술사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선덕여왕이 이처럼 불교를 기반으로 한 사회복지적 역할까지 고려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찰은 이후 자장법사와 의상, 원효 등 당대 고승들이 활동하는 기반이 되었으며, 불교를 통한 사회 통합과 귀족 세력 견제, 민심 안정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4. 자장법사와의 협력 – 국사(國師)를 통한 불교 정치 구현

선덕여왕의 치세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축은 바로 자장법사와의 협력입니다.

 

자장은 당시 신라의 가장 존경받는 고승이자, 당나라 유학을 통해 계율과 불교 제도를 깊이 익힌 인물이었습니다.

 

선덕여왕은 자장을 국사(國師)로 삼아, 정치와 불교를 결합한 국정 운영을 펼쳤습니다. 자장은 황룡사 9층 목탑 건립에도 깊이 관여했으며, 국가 차원의 계율 정비와 불교 교단 통합을 시도하여 왕권을 뒷받침하는 정신적 체계를 마련했습니다.

 

《삼국유사》 ‘자장 정율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장을 국사로 삼고, 그의 말에 따라 나라를 다스렸다.”

 

선덕여왕은 자장을 통해 불교계의 중심을 왕권 아래로 통합시키고, 귀족 세력 견제를 위한 정신적 지도력을 확보하였습니다.

 

당시 신라 사회는 귀족 간의 분열이 잦았기 때문에, 자장과 같은 고승을 통한 중재와 교화는 정치적 안정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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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미래를 설계한 선덕여왕의 시대

선덕여왕의 치세는 전쟁보다는 준비의 시기였습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군사적 위협에 직접 대응하기보다는, 내정 개혁과 정신적 기반 마련을 통해 국가의 근본을 다지는 데 집중하였습니다.

 

천문을 통해 하늘의 뜻을 읽고, 불교를 통해 백성을 다스리고, 건축을 통해 정치적 상징을 남겼습니다. 그녀의 통치는 단순한 여성 왕의 등장이 아니라, 신라가 통일 신라로 나아가기 위한 기틀을 마련한 시대였습니다.

 

선덕여왕의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경주의 문화재로, 불교 유적으로, 역사 속 여성 리더십의 상징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한 국가가 혼란의 시대를 어떻게 준비하고, 어떻게 미래를 설계해 나갔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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