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골 진골 두품! 골이 아픈 신라 신분제도, 이젠 한 방에 정리!
"진골, 성골, 두품…"
역사 시간에 한 번쯤은 들어봤지만 지금도 헷갈리는 단어들.
도대체 신라 사람들은 왜 이렇게 사람을 ‘뼈대’로 나누었을까?
신라시대에는 조선시대 양반 농민 상인 노비 같은 계급, 계층보다 훨씬 더 촘촘하고 고정된 ‘뼈대 기반’ 신분 시스템이 있었어.
사실 신라의 신분제도는 우리 사회의 ‘출신’, ‘학벌’, ‘계급’ 같은 민감한 주제와 연결돼 있어서, 지금 봐도 꽤 시사점이 많은 흥미로운 이야기야. 오늘은 이 복잡한 골품제도를 머리 아프지 않게, 아주 쉽게 풀어볼게.
골품제도란 무엇일까?
골품제도(骨品制度)는 신라 고유의 신분 제도야.
말 그대로 ‘뼈대(골)’와 ‘품계(등급)’를 기준으로 사람을 나눈 거지.
왕족이냐 아니냐, 부모의 혈통이 어떠하냐에 따라 정치 참여, 결혼, 직업까지 전부 달라졌어.
쉽게 말하면, 신라시대는 "태어날 때 이미 내 인생 코스가 정해져 있는 사회"였던 거야.
1. 성골 왕족
왕 될 사람만 모여 있는 클럽느낌.
“왕 될 사람 손~ 🙋♀️”
“어… 나밖에 없는데…?”
성골은 신라 초기의 최상위 계급이야.
왕족 중에서도 진짜 핵심 혈통. 부모 모두가 왕족이어야 성골이 될 수 있었어.
한마디로 최상위권+순혈주의.
왕의 자손이면서 양쪽 부모 모두 왕족 혈통이어야 성골 인정!
이 정도면 왕실 내부에서도 극소수의 ‘왕위 후보자 전용 클럽’이었던 셈이야.
실제로 신라 초기에 왕이 되려면 반드시 성골이어야 했고, 성골끼리만 결혼할 수 있었어.
결혼 상대도 엄격히 제한되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성골 인구 자체가 줄어들었고 결국 사라지게 돼.
대표적인 성골 인물은 신라 제26대 진평왕이나 선덕여왕의 초기 혈통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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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진골 귀족
하지만 진덕여왕 이후로는 진골이 왕위를 차지하게 돼.
성골이 점점 사라지고, 왕족 혈통이지만 한쪽만 왕족이거나 좀 먼 친척이면 진골! 성골이 다 없어지고 나서 왕이 될 수 있게 된 계층이야. 김춘추, 문무왕 등등은 다 진골 출신!
즉, 신라 후반기의 주인공은 진골이었다고 보면 돼.
진골
- 왕은 못 되지만, 실세는 나야!
- 일 잘하고 스펙 좋지만 ‘금수저는 아님’
- 내부 승진형 리더
진골은 성골 바로 아래 계급이야.
부모 중 한쪽이 왕족이거나, 왕족 혈통이 조금 떨어지는 경우였지. 초기에는 왕이 될 수 없었지만, 성골이 사라진 이후에는 실질적인 권력을 잡고 왕위에 오르게 돼.
진골은 고위 관직 진출이 가능했고, 정치와 행정, 군사 모든 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어.
조직에서 말하자면, ‘2인자’였지만 결국 회장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들이라고 볼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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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두품
“우리는… 그냥 백성인가요?”
6두품부터 1두품 – 평민과 노비의 삶
진골 아래에는 숫자로 나뉜 ‘두품 계급’이 있었어.
두품은 머리카락 수가 아니라, 혈통과 신분 등급을 수치화한 거야. 진골 아래로는 6두품부터 1두품까지 있었고, 숫자가 클수록 높음.
이건 일종의 하위 귀족 평민 노비까지 포함하는 계층이었고, 숫자가 높을수록 지위도 높았어.
6두품: | 학문, 종교, 행정 등 전문직 계층. 관직에 오를 수 있었지만 고위직은 제한됨. 대표 인물로는 최치원. |
5~4두품 | 일반적인 평민. 농민, 장인, 상인 등. |
3~1두품 | 신분이 가장 낮은 계층. 대부분 피지배층, |
두품 계급은 출신으로 결정됐고, 결혼 상대도 같은 계층끼리만 가능했어.
즉, 태어나면서 내 직업과 배우자까지 정해졌던 셈이야.
왜 이렇게 복잡하게 나눴을까?
신라는 귀족 중심의 사회였고, 권력과 혈통을 철저하게 관리할 필요가 있었어.
신분이 태어나면서 정해졌고, 바꿀 수 없었다!!!
결국 성골, 진골, 두품으로 나뉘는 신라의 골품제도는 사람을 철저하게 출신과 혈통으로 나누는 시스템이었어. 능력이나 노력보다 태어날 때의 배경이 더 중요했던 사회였던 거지.
왕이 될 수 있는 사람, 고위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을 제한함으로써 권력의 집중과 왕실의 정통성을 유지하려 했던 거지.
성골이 아니면 왕이 될 수 없었고, 진골이어야 고위 관직에 오를 수 있었고, 두품이 낮으면 하고 싶은 일도 못 하고 정해진 길만 따라가야 했어.
그만큼 신라 사회는 계층 간의 벽이 높고 단단했어.
겉으로 보기엔 질서가 잘 유지되는 것 같지만, 내부적으로는 불만과 갈등이 점점 쌓이고 있었던 거야.
이러한 신분 고착은 점점 사회의 활력을 떨어뜨렸고, 귀족 내부의 갈등과 서민들의 불만이 쌓이면서 결국 신라의 몰락으로 이어졌다는 분석도 있어.
지금 우리 사회는 과연 골품제에서 완전히 벗어났을까? 누군가는 출신 학교가 어디냐, 부모가 뭐 하시냐 같은 질문 속에서 여전히 ‘현대판 골품제’를 느낀다고 해.
성골, 진골, 두품.
이 단어들을 보면서 요즘 우리 사회의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가 떠오르지 않아?
학벌, 지역, 집안, 직업, 부모의 사회적 지위…사실 우리는 여전히 무의식적으로 ‘사람을 출신으로 판단’하고 있는지도 몰라.
물론 시대는 바뀌었고, 예전보다 기회의 문은 넓어졌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벽을 느끼며 살아가지.
신라 시대의 골품제는 사라졌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지금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또 다른 눈을 가질 수 있어. 단순히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현실을 비춰주는 거울이 될 수 있어.
사람을 뼈대가 아닌 능력으로 평가하는 사회. 그게 바로 골품제 없는 진짜 평등한 나라 아닐까?
신라의 골품제를 단순한 역사적 유물로만 보지 말고, 지금의 우리 삶과 비교해 보는 것도 중요한 일인 것 같아. 과거의 뼈대가 아닌, 오늘의 나를 증명하는 시대가 되길 바라면서 이야기를 마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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