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Fun 한국사/신라시대

신라시대 한글 이전의 문해력 혁명가, 설총 이야기

by 레미 언니 2025. 8. 1.
728x90
반응형

한글 이전의 문해력 혁명가, 신라시대 설총 이야기

신라시대 어느 조용한 새벽, 신문왕은 홀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삼국을 통일한 뒤 찾아온 평화,

그러나 그 평화는 고요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나라 안은 여전히 들끓고 있었습니다.


언어는 다르고, 생각은 어지럽고,

백성들은 자신이 속한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복잡한 마음을 안고 있던 어느 날, 신문왕에게 한 편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짧고도 강렬한 비유,

불타는 꽃 속에서 깨닫는 진실.

 

신라의 신문왕은 그 글을 읽고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글쓴이를 불러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누구인가.”


그때 고요히 앞으로 나선 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원효대사의 아들이자 신문왕 시대를 대표하는 유학자, 설총입니다.

 

신라에는 문명을 새롭게 만든 지식인이 있었으니 그는 나라의 사상을 설계하고, 백성의 언어를 정치로 끌어올린 문해력 혁명가라 불릴만한 학자였습니다.


설총은 한문 중심 사회에서 '이두'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열었습니다.


신라시대 한글 이전의 문해력 혁명가, 설총 이야기
신라시대 한글 이전의 문해력 혁명가, 설총 이야기

이두, 정치와 백성을 잇는 다리

설총은 글자를 창제하지 않았지만, 글자의 쓰임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이두(吏讀)’라는 고유의 표기법을 발전시켜 신라 백성들도 행정 언어에 접근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두는 한자를 신라어 문법에 맞게 재구성한 문자 체계였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국문 행정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까지 한자는 귀족과 승려 중심의 문자였고, 백성은 읽고 쓰는 것에서 소외되어 있었습니다. 설총은 이를 바꾸기 위해 이두를 체계화하고 관청 문서와 교육에서 활용했습니다.

 

설총의 이두 체계는 단순한 문자 개량이 아니었습니다. 백성의 말이 국가의 언어가 되는, 사상적 전환의 시발점이었습니다.

유교로 나라를 읽다

설총은 유교 경전을 깊이 이해하고 이를 신라 사회에 맞게 해석한 인물이었습니다. 특히 『논어』와 『서경』 등 중국의 유학 고전을 신라의 현실과 연결하려 노력했습니다.

 

그가 남긴 ‘화왕계(花王戒)’는 이 시기의 대표적 유교 정치문서입니다. 신문왕에게 바친 이 글은 이상적인 군주의 자세와 백성과의 관계를 설파했습니다.

 

화왕계는 단순한 정치 훈계문이 아니었습니다. 리더가 갖춰야 할 ‘공감과 절제’의 미덕을 강조한 리더십 철학이었습니다. 이는 유교적 통치윤리를 신라 왕정에 본격적으로 접목한 첫 사례로 평가됩니다.


설총은 철학을 통해 정치의 기준을 새로 쓰고자 했습니다.

글로서 나라를 세우는 사람

설총은 백성을 위한 문자를 고민했고, 왕을 위한 조언을 글로 남겼습니다. 책상 위의 이론이 아니라 삶과 맞닿은 현실 속 실천이었습니다.

 

그는 사회 구조를 바꾸기보다, 의사소통 방식을 바꾸는 데 집중했습니다. 글로써 권력과 백성, 지식과 실천을 이어주는 가교가 되겠다는 발상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설총은 ‘지식인’이라기보다 ‘문화 설계자’였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새로운 매체와 빠른 변화 속에서 ‘전달의 본질’을 고민합니다. 그럴 때마다 설총이 던진 질문이 떠오릅니다.


“그 지식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 글은 누구를 향해 쓰였는가.”


정책과 교육, 사상 모두를 문자를 통해 설계한 신라의 ‘문화 정책가’라고도 할 수 있는 설총.

 

신문왕은 설총을 국학 설립 이후 첫 교수자로 임명하고 그에게 교육 체계를 맡겼습니다. 국학은 신라의 국가 주도 교육기관으로, 유교 인재 양성을 목표로 했습니다.

 

설총은 국학에서 단순한 경전 교육을 넘어서, 나라를 읽고 백성을 이해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그가 키운 유생들은 훗날 신라 후기 정치와 문화를 이끌어갔습니다.

 

당시 신라에는 아직 과거제도도 없었고, 학문은 귀족 중심의 특권이었습니다. 그는 학문을 사회의 중심에 놓고, 지식이 곧 통치의 자격이 되는 문화를 열었습니다.

설총의 유산은 어디에 남아 있는가

설총은 고려 시대까지도 교육의 본보기로 추앙받았습니다. 『삼국사기』는 그를 ‘이두를 해석한 최초의 사람’이라 기록했습니다. 조선에서는 그를 18현(賢) 중 하나로 추대하고, 문묘에 배향했습니다.


이는 그가 단지 신라의 인물이 아닌, 한민족 지성사 전체의 대표자였음을 보여줍니다.

 

설총의 혁신은 기술이 아닌 ‘의미’에 있었습니다.


기존의 언어 체계를 바꾸고, 글을 백성의 도구로 만들려 한 그의 시도는 지금도 유효한 교훈입니다.

 

디지털 시대의 우리는 소통의 도구를 풍부하게 가졌지만, 의미를 나누는 데에는 여전히 고민이 많습니다.

 

설총은 그 시작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을 글로 완성하려 했던 지식인이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당신의 지식은 어떤 방향으로 쓰이고 있나요.


설총은 그 지식을 가장 낮은 자리로 흐르게 해,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지식이 필요합니다.

 

[역사이야기] - 신라 화랑도의 정신적 스승, 원광법사와 세속오계 탄생 이야기

 

신라 화랑도의 정신적 스승, 원광법사와 세속오계 탄생 이야기

신라 화랑도의 정신적 스승 원광법사오늘날 대한민국 청소년 교육이나 윤리강령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의외의 장소에서 그 뿌리를 찾게 됩니다. 바로 고대 신라시대, 그리고 ‘화랑

doremisis.tistory.com

 

[역사이야기] - 여성 리더의 원조, 신라 선덕여왕이 남긴 시대를 초월한 리더십

 

여성 리더의 원조, 신라 선덕여왕이 남긴 시대를 초월한 리더십

신라 선덕여왕이 남긴 시대를 초월한 리더십신라의 선덕여왕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성 군주로서 남성 중심 사회에서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하며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선덕여왕의 이야기는

doremisis.tistory.com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