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과 진덕여왕, 신라여왕의 리더십을 비교하다
1,300년 전,
신라에는 두 명의 여왕이 있었습니다.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이 두 여왕은 혼란기 신라를 이끌며 여성이라는 틀을 넘어 정치의 중심에 섰습니다.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 있던 7세기 신라, 대외적으로는 백제와 고구려의 압박이 거세졌고, 내부로는 귀족 세력이 왕권과 균형을 이루며 힘을 겨루는 구조였죠.
이런 복잡한 정국에서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진덕여왕은 단지 ‘왕’이 아니라 ‘여성 왕’이라는 두 겹의 도전을 안고 있었습니다.
신라의 두 여왕은 단지 ‘성별’로 정의할 수 없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현실에 맞섰습니다. 두 사람의 리더십은 닮은 듯하면서도 분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신라여왕 전례 없는 여성군주의 리더십
신라 역사에서 여성 군주의 등장은 단순한 이례적인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신라의 두 여왕을 나란히 놓고, 그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해보려 합니다.
우선 두 여왕은 모두 신라의 성골 체제를 유지하던 마지막 여성 군주로, 김유신·김춘추 등 차세대 권력자와의 협력을 바탕으로 국정을 안정시키려 했습니다.
여성 군주라는 정치적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종교적·제도적 기반을 강화하며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보였다는 점도 유사합니다.
선덕여왕 | 진덕여왕 | 공통점 | |
재위 시기 | 632~647년 | 647~654년 | 7세기 중엽, 신라의 격동기 정치 주도 |
즉위 과정 | 성골 여왕으로 계승. 왕권 약화 우려 속 김유신 등의 지지 확보 | 김춘추·김유신의 정치적 조율로 즉위 | 여성 군주에 대한 도전 속에서도 정치 연합을 통한 즉위 |
핵심 인물과의 협력 | 김유신과 군사적 신뢰 관계 중심 | 김춘추와 정치·외교 중심의 협력 | 김유신·김춘추 등 신흥 세력과의 협력 |
정치 스타일 | 상징적 리더십. 위기 시 민심을 안정시키는 신화적·정서적 접근 | 실용적 리더십. 제도와 외교로 안정적 국가 운영 지향 | 남성 귀족 중심 사회에서 주체적인 정국 운영 시도 |
정책 기조 | 불교 중심, 천문 해석, 상징적 조치 (황룡사 9층탑 건립 등) | 당나라식 관복·대외 전략 구체화 | 국정 운영의 근거 마련과 정통성 강화 노력 |
외교 전략 | 외세 견제보다는 자주적 왕권 중심 전략 | 당나라와의 유대 강화 및 삼국통일 기반 외교 추진 | 국제 정세를 고려한 외교적 접근 |
군사 대응 | 백제의 침략에 군사 대응. 김유신의 군사력 활용 강조 | 실질적 군사정책보다는 외교 기반 마련에 집중 | 삼국 간 대립 속 방어적 대응 기반 유지 |
역사적 평가 | 여왕으로서의 상징성과 개혁 추진 의지로 높은 평가 | 조용하지만 체계적 기반 마련에 기여한 실용 군주로 평가 | 여성 통치자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제 역할 수행 |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은 같은 ‘여왕’이었지만, 정치 상황과 리더십 방식은 확연히 달랐습니다.
선덕여왕이 상징과 결단의 리더십을 통해 급변하는 정국을 이끌었다면, 진덕여왕은 그 혼란을 정리하고 다음 세대를 위한 기반을 다지는 실용적 리더십을 보였습니다.
둘 다 여성 군주로서 쉽지 않은 환경에서 통치했지만, 한 사람은 '길을 내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길을 정비했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선덕여왕, 상징과 메시지로 통치한 여왕 위기의 상징이 되다
선덕여왕(재위 632~647)은 강한 상징과 메시지를 통해 리더십을 구축한 인물이었습니다.
즉위 초기부터 “여자가 어찌 나라를 다스리겠는가”라는 귀족들의 반발을 마주해야 했고, 성골 남자 후계자가 단절된 상황에서 즉위한 그녀는 백제와의 전쟁, 귀족 세력의 반발, 정치적 불안이라는 삼중고를 안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선덕여왕은 왕권의 상징성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정신적 리더십과 신비한 상징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첨성대와 황룡사 9층탑 건립입니다.
세계 최초의 천문대라 불리는 이 건축물은 단순한 과학기구가 아니라, “하늘의 이치를 꿰뚫는 왕”이라는 여왕의 지혜를 보여주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녀는 첨성대를 건립하여 하늘의 뜻을 읽는 군주로서의 위상을 높였지요.
또한 황룡사 9층탑 건립을 지시하며 국가의 정통성과 종교적 기반을 다졌습니다. 이는 삼국을 평정하려는 상징적 조치로 여겨졌습니다.
이는 선덕여왕이 단순한 정치가를 넘어, 신성과 예지력을 지닌 존재로 받아들여졌음을 보여줍니다. 그녀의 리더십은 상징과 신화, 신뢰와 결단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이런 일화가 전합니다.
“당나라 황제가 모란꽃 씨를 선물했을 때, 꽃을 보기 전 씨만 보고 향기가 없을 것이라 예언했다. 실제로 꽃이 피니 향기가 없었다.”
이러한 전설은 선덕여왕을 예지력과 통찰력을 지닌 신비한 존재로 묘사하게 했고, 정치적 정당성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선덕여왕은 상징만을 내세운 왕이 아니었습니다. 반란의 위협 속에서도 김유신과 손잡고 실질적인 군사력을 동원해 반란을 진압했으며 위기의 신라를 안정시켰습니다.
즉, 그녀의 리더십은 정신적 상징을 활용한 통치와 강단 있는 결단력이 결합된 형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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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덕여왕, 제도와 외교로 다진 실용적 리더십
반면 진덕여왕(재위 647~654)은 선덕여왕과는 성격이 다른 리더십을 보였습니다. 진덕여왕은 신라사에서 다소 조용하게 기억되지만, 그녀의 역할은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즉위 초기에 반란 없이 안정적으로 정국을 장악한 그녀는, 제도 정비와 국제 전략을 통해 실용적인 리더십을 실현했습니다.
주목할 점은 외교 전략입니다.
당시 김춘추와 김유신은 삼국통일을 위한 전략을 구상하고 있었고, 진덕여왕은 이러한 구상을 가능하게 만드는 제도적, 외교적 환경을 조성한 역할을 했습니다.
진덕여왕은 즉위 이후 당나라식 관복을 도입하고, 국내 연호를 폐지하고 연호를 ‘영휘(永徽)’로 바꾸는 등 실질적인 외교 기반 정비에 힘썼습니다. 당에 사신을 보내 우호관계를 강화하려는 노력도 하였습니다.
그녀는 전면에 나서기보다 국정의 기반을 조정하고 후계 세력의 무대 준비에 집중한 조용한 실천가였습니다. 이는 훗날 김춘추가 당과 연합해 백제를 멸망시키는 삼국 통일 외교의 기반이 됩니다.
선덕여왕이 지닌 카리스마와 대중적 상징성에 비해, 진덕여왕은 내실을 다지고 국정 기반을 재정비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즉, 진덕여왕의 리더십은 상징이 아닌 제도적 기반 마련과 국제 정세 활용에 초점을 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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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이 상징과 결단의 리더였다면, 진덕여왕은 제도와 외교의 리더였습니다.
한 명은 “신라가 여왕을 가졌다는 역사적 선언”을 했고, 다른 한 명은 “신라가 통일을 준비하는 기틀을 완성”했습니다.
결국 이 두 여왕의 리더십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통일신라의 길을 열었던 두 축이 되었습니다. 신화와 상징, 그리고 실용과 제도의 균형 속에서 신라는 천년 왕국으로 나아가는 토대를 갖추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두 여성 군주의 리더십은 오늘날에도 위기 대응과 장기 전략 수립이라는 리더십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위기 속에서 어떤 리더십이 필요한지, 상징과 실용의 균형은 어떻게 맞춰야 하는지를 되돌아보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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