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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n 한국사/신라시대

김헌창의 난, 왕위계승의 한과 신라하대 헌덕왕의 피로 쓴 왕조

by 레미 언니 2025.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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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창의 난과 헌덕왕

피로 쓴 왕조의 불안, 거대한 반란의 서막

 

안녕하세요! 역사 탐험가 레미언니입니다. 😉

 

지난 글에서 우리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왕권 강화를 시도하다가 숙부의 칼날 아래 스러져간 비운의 애장왕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오늘은 바로 그 칼날을 휘둘러 왕위에 오른 신라 제41대 왕, 헌덕왕(憲德王)과 그의 재위 기간을 뒤흔든 가장 거대한 사건, 김헌창의 난(金憲昌의 亂)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해요.

 

김헌창의난은 신라 하대 왕권이 얼마나 취약했으며, 지방 세력의 이반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충격적인 역사적 사건이랍니다.

 

과연 헌덕왕은 어떤 과정을 거쳐 왕위에 올랐고, 김헌창은 왜 이토록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켰을까요? 그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시작으로 함께 떠나볼까요?


1. 피로 물든 즉위, 숙부의 칼날, 조카를 향하다

헌덕왕의 본명은 김언승(金彦昇)이에요. 그는 원성왕의 손자이자 애장왕의 숙부였죠. 애장왕이 불과 13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김언승은 또 다른 숙부인 김제옹 등과 함께 어린 왕의 섭정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왕을 대신하여 국정을 돌보는 위치에 있었으니, 당시 왕실 내 최고 실력자 중 한 명이었다고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섭정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애장왕이 나이가 차면서 친정(親政)을 시작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왕권을 강화하며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에요. 지방 행정 제도를 정비하고, 자신의 혈통적 정통성을 확고히 하려는 어린 왕의 시도는 섭정이었던 숙부 김언승에게는 자신들의 영향력이 줄어들 것에 대한 위협으로 다가왔을 겁니다.

 

신라 하대는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들의 권력이 비대해지는 시기였으니까요. 왕실 내부에서조차 끊임없이 왕위 쟁탈의 암투가 벌어지던 혼란기였다고 할 수 있죠.

 

결국, 809년, 숙부 김언승과 김제옹 등은 쿠데타를 일으켜 애장왕을 대궐에서 시해(弑害)하는 충격적인 사건을 벌입니다.

 

불과 22세의 나이였던 애장왕은 그의 동생 김체명과 함께 비참하게 목숨을 잃고, 김언승은 그 칼날 위에 서서 스스로 왕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신라 제41대 왕, 헌덕왕입니다.

 

이 사건은 신라 하대 왕위 계승 질서가 완전히 붕괴되고, 권력 다툼이 살육전으로까지 치닫는 비극적인 현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남아 있어요. 헌덕왕의 즉위는 이후 신라 하대에 계속될 피비린내 나는 왕위 쟁탈전의 서막을 활짝 열어버린 거나 마찬가지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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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헌창의난, 꺾인 왕위 계승의 한

왜 반란의 깃발을 들었을까? 

 

피로써 왕위에 오른 헌덕왕의 통치는 결코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즉위 자체가 수많은 불씨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중에서도 헌덕왕의 왕권을 가장 강력하게 흔들었던 사건이 바로 '김헌창의 난'입니다.

 

그렇다면 김헌창은 왜 이토록 거대한 반란을 일으켰을까요?

 

김헌창(金憲昌)은 원성왕의 증손자이자, 신라 중대 강력한 왕권을 상징했던 무열왕 계열의 후손인 김주원(金周元)의 아들입니다.

 

그의 아버지 김주원은 과거 원성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 신라 왕위 계승 1순위 후보였어요.

 

당시 선덕왕에게 아들이 없어 다음 왕위를 계승할 유력자로 지목되었던 것이죠. 그러나 폭우로 강물이 불어 강을 건널 수 없게 되면서 궁에 들어가지 못했고, 그 사이 김경신(원성왕)이 먼저 입궁하여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김주원은 이러한 불운으로 왕위를 놓쳤지만, 여전히 유력한 세력으로 인정받아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 일대) 도독(都督)으로 봉해져 사실상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습니다. 김헌창은 바로 그러한 김주원의 아들이자, 자신 또한 신라 고위 관직을 두루 거치며 중앙 정계에서 활약했죠.

 

그러나 그의 가문은 왕위 계승에서 번번이 배제되어 온 역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애장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른 헌덕왕의 즉위는 김헌창의 입장에서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헌덕왕의 즉위는 왕실 내부의 정통성 논란을 더욱 심화시켰고, 김헌창은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을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 김주원이 놓쳤던 왕위, 즉 '적법하게 자신들의 것이었어야 할 왕위'를 되찾기 위해, 그리고 헌덕왕의 불법적인 왕위 찬탈에 대한 반발심을 안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당시 신라 왕실의 깊어진 분열과 왕위 계승을 둘러싼 피비린내 나는 암투가 폭발한 사건이었던 거예요.

 

김헌창의 난과 헌덕왕, 피로 쓴 왕조 거대한 반란의 서막
김헌창의 난과 헌덕왕, 피로 쓴 왕조 거대한 반란의 서막

3. 반란의 불꽃, 전국을 뒤흔들다

마침내 822년(헌덕왕 14년) 3월, 김헌창은 웅진(熊津, 지금의 공주)을 거점으로 반란의 깃발을 높이 들었습니다. 

 

그는 독자적인 국가인 장안국(長安國)을 선포하고, 자신을 '장안왕'이라 칭했어요.

 

이는 신라 중앙 정부에 대한 전면적인 불복종을 의미했으며, 지방 세력의 독자적인 성장을 공식화하는 선언과도 같았죠.

 

김헌창의 세력은 삽시간에 신라 국토의 상당 부분을 장악했습니다. 특히 과거 백제의 영토였던 웅진(공주)을 시작으로, 무진주(광주), 청주(청주), 완산주(전주), 사벌주(상주) 등 서남해안과 호남 지역, 그리고 영남의 일부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세력으로 확산되었답니다.

 

이는 통일 신라가 외형적으로는 강력해 보였지만, 이미 지방에 대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심각하게 약화되어 있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증거였어요.

 

지방 호족들은 신라 중앙의 혼란을 틈타 독자적인 세력을 키우고 있었고, 김헌창은 바로 그 불만을 한데 모아 거대한 반란군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죠. 이 거대한 반란은 헌덕왕의 왕권을 뿌리째 흔들었습니다.

 

과연 헌덕왕은 이 사상 초유의 위기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김헌창의 난은 신라 역사에 어떤 상처를 남기고 종결되었을까요? 그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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