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Fun 한국사/고구려

보장왕, 역사의 끝에서 고구려를 다시 꿈꾼 마지막왕, 멸망 후에도 꺼지지 않던 재건의 불꽃

by 레미 언니 2025. 8. 17.
728x90
반응형

고구려 보장왕

역사의 끝자락에서 나라를 놓지 않았던 비운의 마지막왕

 

고구려의 장구한 역사 속에는 수많은 영웅왕들의 이름이 빛나지만, 그 마지막을 장식한 왕의 이름은 어딘가 모르게 쓸쓸하게 들립니다. 바로 고구려 제28대이자 최후의 왕, 보장왕(寶藏王)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642년에 왕위에 올라 고구려가 멸망하는 668년까지, 무려 27년간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치세는 안팎으로 휘몰아치는 격랑 속에서 고구려가 서서히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던, 비극적인 시기였죠. 많은 이들이 보장왕을 '연개소문의 허수아비 왕'이나 '고구려 멸망의 증인'으로 기억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그는 강력한 권력을 쥔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그늘 아래서 제대로 된 왕권을 행사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고구려의 멸망을 지켜보기만 했을까요?

 

역사의 표면적인 기록 뒤편에서, 보장왕은 고구려의 왕으로서 마지막까지 나라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심지어 멸망 후에도 고국을 되찾기 위해 애썼던 흔적들을 남겼습니다. 비록 그의 노력이 직접적인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을지라도,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 그가 보여준 고구려를 향한 마음을 지금부터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실권 없는 왕의 즉위

그러나 고구려 '최후의 방패'를 짊어지다

 

보장왕의 즉위 과정은 그 시작부터 파란만장했습니다. 그는 선대 왕이었던 영류왕이 연개소문에 의해 시해된 직후, 연개소문의 주도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그의 재위 기간 내내 고구려의 실질적인 통치권은 대부분 연개소문에게 있었습니다.

 

주요 국가적 결정들이 그의 의도나 건의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많아요. 겉으로만 왕좌에 앉아있을 뿐, 자신의 의지를 펼치기 힘든 상황이었죠.

 

그러나 보장왕은 그러한 제약 속에서도 고구려의 국난을 묵묵히 마주해야 했습니다.

 

그의 재위 기간은 고구려가 그 어떤 때보다 강력한 외부 세력의 압박에 직면했던 시기였고, 보장왕은 고구려의 국왕으로서 이 거대한 위협의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 안시성 전투의 영광을 함께한 왕: 보장왕 재위 중 가장 빛나는 순간은 단연 645년에 벌어진 안시성 전투입니다. 당 태종이 연개소문의 영류왕 시해를 명분 삼아 무려 1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였어요. 당 태종이 직접 진두지휘한 이 침공은 고구려의 운명을 결정지을 거대한 전쟁이었죠. 하지만 고구려는 안시성 성주와 백성들의 끈질긴 항전으로 당 태종의 대군을 막아냈고, 결국 당나라 군대는 엄청난 손실을 입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안시성 전투는 고구려 역사상 손꼽히는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비록 이 전투의 승리가 연개소문과 안시성 성주의 뛰어난 지휘 아래 이루어졌다고는 하나, 이 승리는 엄연히 '고구려'의 승리이자 '보장왕의 재위 기간'에 일어난 눈부신 성과였습니다. 보장왕은 비록 실권이 부족했을지언정, 고구려가 거둔 영웅적인 저항과 승리의 순간을 고스란히 겪어내며, 고구려의 왕으로서 그 모든 국난을 온몸으로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는 고구려의 마지막 저력을 세상에 알린 상징적인 존재가 되어 주었습니다.

안시성 전투의 영광을 함께한 왕
안시성 전투의 영광을 함께한 왕

2. 혼란과 고립 속에서 이어진 고구려의 몸부림

 

안시성 전투 이후에도 당나라의 공격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당 태종의 죽음으로 일시적인 소강상태도 있었지만, 당 고종 역시 고구려 정복 야욕을 버리지 않았어요.

 

보장왕의 치세 동안 고구려는 북으로는 당나라의 지속적인 침공, 남으로는 백제와 함께 신라와의 적대 관계를 이어가는 등, 대외적으로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습니다.

 

  • 백제, 왜와의 연대 노력: 고구려는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백제와는 관계를 굳건히 하고 바다 건너 왜(일본)와도 관계를 재개하며 신라를 더욱 압박했습니다. 당나라는 고구려에 대해 신라 공격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고구려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며 자주적인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이러한 외교 활동은 비록 연개소문의 주도 아래 이루어졌지만, 당과 신라라는 강력한 연합 세력에 맞서 고구려의 활로를 모색하려 했던 처절한 몸부림의 일환이었습니다.

 

3. 나라 잃은 슬픔 넘어, 재건의 불꽃을 다시 지피다

고구려 멸망 후 보장왕의 삶은 더욱 기구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고구려를 향한 마음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들이 남아있습니다.

 

  • 당의 회유책 속에서 찾은 희망: 668년, 고구려는 당나라와 신라의 총공세에 결국 멸망하고, 보장왕은 당나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됩니다.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보장왕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677년, 당나라는 보장왕을 '요동도독 조선군왕'에 임명하여 요동 지역의 고구려 유민들을 통치하게 했어요. 겉으로는 당의 통치 체제 안에서 고구려 유민들을 관리하는 역할이었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보장왕에게는 고구려 재건의 실낱 같은 희망을 다시 품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비록 당나라의 감시 아래 있었지만, 고구려 왕족으로서 유민들과 직접 만나고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죠.

 

  • 말갈족과의 비밀 교류, 꺼지지 않는 재건의 의지: 보장왕은 당의 꼭두각시로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하고, 당시 북방의 강력한 세력이었던 말갈족과 은밀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고구려 부흥 운동을 계획했습니다. 멸망한 지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는 고구려의 왕으로서 나라를 되찾으려는 의지를 결코 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당나라에 발각되면서, 보장왕은 681년 결국 사천성으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682년경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의 마지막은 비극적이었지만, 죽음의 순간까지 고구려의 부활을 꿈꿨다는 점에서 그의 굳건한 정신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한계를 넘어 나라를 사랑했던 고구려의 마지막왕

보장왕은 왕으로서 강력한 실권은 없었지만, 그의 재위 기간 동안 고구려는 안시성 전투와 같은 빛나는 승리를 통해 강력한 저항 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이 영광과 고통의 순간들을 고구려의 왕으로서 함께 견뎌냈습니다.

 

또한, 멸망 후에도 고구려 재건을 위해 은밀히 노력했던 그의 행적은, 그가 결코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왕이 아니었음을 증명합니다.

 

보장왕의 생애는 비극으로 점철되었지만, 고구려의 마지막 숨결과 그 불꽃을 지피려 했던 그의 헌신은 우리 역사에 깊은 의미를 남깁니다. 그는 단순한 종말의 증인이 아니라,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고 나라를 놓지 않았던, 한계 속에서 고군분투했던 마지막 고구려 군주로 기억되어야 할 것입니다.

 

[Fun 한국사/백제] - 의자왕 뜻과 업적, 삼천궁녀 오명 속 백제를 위해 싸운 빛나는 발자취

 

의자왕 뜻과 업적, 삼천궁녀 오명 속 백제를 위해 싸운 빛나는 발자취

의자왕 뜻, 의롭고 자애로운 왕?삼천궁녀 오명 속 백제 부흥 꿈꾼 군주의 진실! 백제 마지막 왕인 31대 의자왕(義慈王, 재위 641년 ~ 660년)이라고 하면 아마도 많은 분들이 삼천궁녀 이야기에 이어

doremi-life.co.kr

[Fun 한국사/신라시대] - 김춘추 사람을 읽는 신라의 천재, 사회적 지능으로 본 리더의 조건

 

김춘추 사람을 읽는 신라의 천재, 사회적 지능으로 본 리더의 조건

사람을 읽는 신라의 천재, 김춘추 사회적 지능으로 본 리더의 조건 성골만 왕이 될 수 있었던 신라시대, 골품제의 벽이 있던 그 시대에 왕진골귀족 신분으로 왕이 될 수 없는 혈통으로 태어났지

doremi-life.co.kr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