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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n 한국사/고구려

영류왕 업적, 백성을 위해 평화와 방어를 끝까지 고심했던 고구려왕

by 레미 언니 2025. 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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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영류왕

격변의 시대, 외교와 국방으로 고구려를 이끌다

 

고구려의 역사는 정말 파란만장했습니다. 특히 중국 대륙의 질서가 바뀔 때마다 고구려는 중대한 기로에 서야 했죠. 오늘 이야기할 고구려의 제27대 왕 영류왕(榮留王)은 바로 그러한 격동의 시기에 왕위에 올라, 나라의 명운을 책임져야 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618년에 즉위하여 642년까지 재위했어요. 영류왕이 즉위한 618년은 고구려를 집어삼키려 했던 거대한 수(隋) 나라가 막대한 국력 소모 끝에 멸망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통일 왕조 당(唐) 나라가 등장하며 중국 대륙의 질서가 완전히 바뀌던 때였습니다.

 

수나라와의 기나긴 전쟁으로 고구려 역시 많은 국력을 소모한 상태였기에, 새로운 강자와의 관계 설정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였답니다. 영류왕은 과연 어떤 선택을 통해 고구려를 이끌고자 했을까요?


1. 평화를 향한 외교, 당(唐)나라와의 유화 정책

영류왕은 새로운 강자인 당나라와 되도록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동안  수나라와의 전쟁으로 고구려 역시 많은 힘을 소진했었던 만큼, 또다시  거대한 제국과 전쟁을 치르는 것을 피하고자 한 것이죠.

 

고구려에서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는 등 유화적인 태도를 취했는데, 영류왕의 이러한 대당(對唐) 외교 정책은 '온건파'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강대국에 굴복한 사대주의적 태도라는 비판도 있지만 평화를 통해 고구려의 실리를 찾으려는 실용적인 접근 방식이었다고 평가됩니다.

 

전쟁으로 소모된 국력을 회복하고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던 고구려의 영류왕.

2. 천리장성 축조 시작

보이지 않는 위협에 대비하다

 

영류왕은 겉으로 평화로운 외교를 추구하면서도, 당나라가 언제든 고구려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잠재적인 존재임을 간과하지 않았습니다. 미래를 내다본 그의 통찰력은 강력한 국방 정책으로도 나타났습니다.

 

실제로 632년 2월, 영류왕의 지시로 고구려의 서쪽 국경에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축조하기 시작했어요.

 

이 거대한 국방 사업은 646년까지 무려 15년간 지속될 예정이었는데요. 천리장성은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세운 거대한 방어 시설로, 단순히 성벽을 쌓는 것을 넘어 고구려의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건축물이었죠.

 

영류왕은 유화적인 외교정책과 더불어 이렇게 철저한 국방 대비를 통해, 외부의 어떤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는 고구려를 만들고자 노력했습니다. 고구려 백성들이 더 이상의 고통 없이 안정된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진심이 있었기에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 봅니다.

 

백성을 위해 평화와 방어를 끝까지 고심했던 영류왕
백성을 위해 평화와 방어를 끝까지 고심했던 영류왕

3. 비극적 최후, 격화되는 내부 갈등

하지만 영류왕의 온건한 대당 외교 정책과 국방 강화 노력은 모든 이의 동의를 얻었던 것은 아니에요. 당시 고구려 내부에는 새로운 강자 당나라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강경파'가 있었고, 그 중심에는 바로 연개소문이 있었습니다.

 

영류왕의 온건한 외교 정책과 연개소문의 강경한 군사 정책 주장은 시간이 갈수록 격렬한 대립으로 치달았습니다. 이는 단순한 정책 차이를 넘어 고구려 내부의 권력 갈등으로 번졌죠. 결국 영류왕은 이러한 갈등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연개소문에 의해 비극적으로 살해되는 불행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평화와 백성을 위해 모든 것을 고민했던 왕

 

영류왕은 수나라와의 기나긴 전쟁 이후 혼란했던 고구려를 안정시키고, 급변하는 동아시아 국제 정세 속에서 나라의 미래를 깊이 고심했던 왕입니다. 그는 무엇보다 고구려 백성들의 평화와 안녕을 최우선에 두며 더 이상의 고통스러운 전쟁을 피하려 노력했어요. 

 

대륙의 새로운 패자로 떠오른 당나라와 유화적인 외교 관계를 맺음으로써, 또다시 백성들의 희생을 초래할 소모적인 국력 낭비를 막고자 했습니다. 평화적인 외교 노력을 펼치면서도, 혹시 모를 미래의 위협에 대비해 천리장성이라는 거대한 방어선을 백성들과 함께 쌓기 시작하는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죠. 

 

평화를 위한 끈질긴 외교.

 

백성을 위한 철저한 안보 구축.

 

이 두 가지 길을 끝까지 고민했던 그의 모습은 시대를 초월하는 리더의 책임감을 보여줍니다.

 

비록 그의 비극적인 최후가 고구려의 몰락을 가속화하는 요인이 되었다는 평가도 있지만, 영류왕이 보여준 평화를 향한 끈질긴 노력과 백성을 위한 안보 고민, 그리고 미래를 위한 통찰은 고구려 역사 속에서 분명히 기억되어야 할 중요한 리더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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